나바위성지

나바위성지와 김대건신부

나바위 성지는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45년 10월 12일 밤, 조선교구 3대 교구장이신 고 페레올 주교와 안 다블뤼(Daveluy) 신부 그리고 11명의 조선교우들이 첫 발을 내딛은 곳이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로는 면천고을 솔뫼에서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미 증조부 복자 김진후 비오와 숙조부 복자 김한현 안드레아, 당고모 성녀 데레사, 부친 성 김제준 이냐시오가 순교한 순교자 가문이다.

솔뫼에서 태어나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주하게 된다. 이때가 7살이었다. 김대건의 부친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신 순교성인이시다. 김대건이 첫영성체를 한 것은 1836년 1월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모방(Maubant) 신부에 의해서였다.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적당한 소년을 찾고 있던 중 골배마실 은이공소에서 김대건 소년을 신학생으로 선발하게 된다.

어린 몸에 어려운 길을 서슴지 않고 따르겠다고 나선 소년 김대건의 소망은 겨레의 영혼을 구하겠다는 너무나도 거룩하고 원대한 것이었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김대건은 7월에 서울로 올라와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그해 12월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귀국하는 길에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

장차 한국교회의 순교성인으로 빛날 교우들인 정하상 바오로, 현석문 가롤로, 조신철 가롤로의 호송을 받으며 일행은 고국산천을 작별하고 부모를 떠나 만주땅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세 소년은 조선의 교우들과 작별하고 중국인 안내자를 따라 봉천, 산해관, 북경, 천진, 광동을 거쳐 목적지인 마카오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세 소년은 1837년 6월 6일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에 도착한다. 그러나 함께 갔던 최방제가 1년만에 병사하는 불행을 맞는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이 학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 조국에서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김대건의 부친과 최양업의 부모님이 순교하게 된다. 모방(Maubant) 나 신부와 2대 교구장이신 앵베르 주교 그리고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한국교회의 지도급 교우들이 순교하는 대박해였다.

조선은 또다시 목자 없는 교회가 되어 교우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김대건은 1844년 조선교구 3대 교구장으로 선임된 페레올 주교에게 12월 15일에 부제품을 받게 된다. 그리고 선교사의 조선 영입을 위해 1845년 1월 김대건은 의주쪽으로 어렵게 혼자 입국하는데 성공한다. 그에게는 교회의 실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조선교회에 주교를 맞아 들여야 하는 중대한 의무가 주어져 있었다. 외국인 성직자들이 육로로 조선에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작은 배 한 척을 사서 현석문 가롤로 등 11명의 교우들과 상해로 돌아간다. 그리고 1845년 8월 17일 상해에서 20리쯤 떨어진 김가항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한국인 첫 사제로 서품된다. 조선교회창립 61년만의 일이었다.

8월 31일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라파엘호’라고 이름을 붙인 작은 어선을 타고 조선을 향해 출발한다. 라파엘호가 처음에는 요동방면으로 가는 중국 배에 끌리어 산동성까지 무사히 이르렀으나 갑자기 거센 풍파를 만나 키는 부러지고 돛은 찢어져 물결이 치는대로 배를 맡기게 되었다. 9월 28일 라파엘호는 제주도의 해안에 닿게 된다. 이로부터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금강으로 접어들어 60리쯤 올라가서 은진군 강경에서 조금 떨어진 나바위에 상륙하게 된다. 9년 만에 사제가 되어 돌아온 김대건 신부와 꿈에도 그리워하며 6년을 포교지를 향해 준비한 페레올 주교의 감사의 기도로 나바위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1845년 10월 12일 밤, 방갓과 상제옷으로 몸을 가린 후 어두운 밤 나바위에 첫 발을 디딘 것은 상해를 떠난 지 바닷길 42일만이었다. 바로 이 세 분 성직자들의 거룩한 첫마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나바위 성지이다.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

1821 08.21 솔뫼에서 탄생
1836 07.11
모방(Maubant)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됨. 국내에서 성직자로 양성키 어렵다고 판단 최양업(崔良業,토마스), 최방제(崔方濟, 프란치스코)와 마카오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로 보내기로 결정, 12월 3일 서울 출발.
  12.28 변문(邊門) 도착. 요동(遙東)과 만주를 거쳐 중국 대륙을 횡단한 끝에 마카오 도착(1837년 6월 7일)
1836
~1839
  마카오 민란 등으로 두 번 필리핀 마닐라의 롤롬보이로 피신
1840
~1841
  마카오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서 철학과 신학공부
1842   조선으로 입국하기 위해 에리곤(Erigone)호의 세실(Cecille)함장의 통역사 자격으로 승선하였으나 세실 함장의 마닐라행 결정으로 하선하여 9월 11일 상해(上海) 베시(Besi)주교 댁에 머물며 입국 시도.
  10.02 상해 출발하여 10월 22일 태장하(太莊河) 부근 요동 땅에 도착. 백가점(白家店)에 머물며 입국 시도.
  12.23 가난한 나무꾼으로 변장, 변문으로 향함. 단독으로 입국 시도하여 국경선을 넘어 의주를 통과할 수 있었으나 위험을 느끼고 돌아옴. 도중에 눈 위에 쓰러져 동사할뻔 했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백가점으로 돌아옴 (1843.1.6)
1843
음력 3월, 9월
변문에서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동북 국경 쪽 입국 방법을 의논.
  12.31 양관(陽關)에서 제 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Ferrol, 高) 주교 성성식 참석.
1844   동북 국경을 통한 입국을 위해 2월 4일 출발. 경원(慶源)에서 조선 교회의 밀사들과 만나 동북 국경을 통한 입국이 의주길보다 더 어렵다고 판단하여 4월 백가점에 돌아옴. 신학과정을 마치고 삭발례로부터 부제품까지 받음(12.15이전)
1845 01.01
네 번째로 변문에 감. 1월 15일 귀국에 성공하여 서울 도착.
  04.30 11명의 신자와 함께 라파엘호에 탑승, 제물포를 출발하여 6월 4일 오송구(吳松口)를 거쳐 상해에 도착.
  08.17 상해 김가항(金家基)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서품 받음.
  08.24
횡당(橫塘) 신학교 성당에서 첫 미사 봉헌. 8월 31일 라파엘호에 페레올 주교, 다블뤼(Daveluy) 신부를 태우고 상해 출발. 제주 용수리 포구에 표류.
  10.12 강경(江景) 부근 황산포(黃山浦) 나바위에 상륙. 11월과 12월 서울 및 은이공소 순방.
1846 04.08 은이공소에서 마지막 미사. 주교의 지시로 선교사 영입을 위한 새통로의 개척을 위해 5월 14일 마포 출발, 연평도를 거쳐 백령도에 이르러 청국 어선과 접촉, 편지와 지도를 보내고 순위도(巡威島)로 돌아왔을 때 뜻밖에 6월 5일, 관헌에게 체포 됨.
  06.10
해주 감영으로 이송 됨. 6월 21일 서울로 압송 되어 포청에 갇힘. 7월 20일 르그레즈와와 리브와 등 스승 신부들에게 하직 편지 씀.  8월 29일 페레올 주교와 교우들에게 하직 편지 씀. 9월 16일 군문효수형으로 새남터에서 순교. 김 신부의 시신은 10월 26일 미리내로 안장 되었고, 1901년 5월 21일 용산 신학교로 이장 되었으며, 1960년 혜화동 대신 학교 성당으로 이장 됨.
1925 07.05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순교자 79명과 함께 시복 됨.
1949 11.15 한국 성직자들의 주보성인으로 결정됨.
1984 05.06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른 한국 순교자 102명과 함께 시성 됨.

김대건 신부님과 관련된 성지

» 솔뫼_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이며 김씨 집안의 4대 순교자가 살던 신앙의 못자리이다.
김대건 신부와 그의 아버지 성 김제준 이냐시오, 그리고 당고모인 성 김 데레사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증조 할아버지인 김진후(비오, 1814년 순교),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안드레아, 1816년 순교), 아버지 김제준(이냐시오, 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 신부(안드레아, 1846년 순교)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터로 김대건 신부의 신앙이 싹튼 곳이다.
면천 고을 솔뫼로 불리던 이곳에서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에 태어났다.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에 위치한 솔뫼는 소나무 숲이 청청하다고 하여 솔뫼(松山)라 불린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 할아버지인 김진후(비오, 일명 운조)는 50세에 영세한 이후 ‘내포 지방의 사도’ 라고 불리는 이존창(루도비코) 에게서 복음을 전해 들은 뒤 벼슬을 버리고 신앙 생활에 전념하다가 신해, 신유박해 때 체포, 10여년을 옥살이 하다 해미 감옥에서 옥사 하였다.

이후 김진후의 셋째 아들 김종한(안드레아, 일명 한현)이 순교했고(1816년), 1839년에는 다시 둘째 아들 김택현의 아들 김제준(이냐시오)이 순교, 1846년에는 김제준의 아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김대건 신부님의 가문은 32년 사이에 4대가 순교하는 영광의 가문이 되었고, 솔뫼는 ‘신앙의 못자리’로, ‘한국의 베들레헴’으로 불리게 되었다.

» 골배마실_ 성소의 꿈을 키우며 소년시절을 보낸 곳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곳이며, 김제준(이냐시오)성인과 김대건 신부의 신앙이 잠들어 있는 골배마실은 김대건 신부의 소년시절의 향취가 남아있는 곳이며, 성소의 꿈을 키우던 장소이다.
골배마실에서 김대건 신부의 그의 나이 15살 때에 신학생 후보를 찾아 헤매던 모방 신부의 눈에 띄어 장래 조선 교회를 이끌 목자의 재목으로 선택된다. 골배마실은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몸과 마음을 준비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지금 골배마실은 그 흔적이 없다. 다만 김대건 신부가 살던 집터만이 골프장(양지 컨트리 클럽) 한쪽에 보존돼 그의 석상과 제대, 초가집과 어머니 고 우술라의 모습을 새긴 부조만이 남아 있다. 또 하나 김대건 신부가 어릴 적 손길이 닿았다는 늙는 고욤나무 한 그루가 다른 나무들 사이에 무심하게 서 있을 뿐이다.
골배마실이라는 지명은 옛날부터 첩첩산중인데다 뱀과 전갈이 많이 나오는 지역이라서 뱀마을, 즉 ‘배마실’이라고 부르던 동네에서 시작되는 산골짜기 안쪽에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은이 성지_ 세례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성소의 요람

은이 마을은 박해시대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자들의 눈을 피해 모여 살게 되면서 시작된 교우촌으로, ‘은이'(隱里)란 글자 그대로 숨어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은이 공소는 1836년 4월, 조선 최초의 선교사 모방 신부가 소년 김대건에게 ‘안드레아’ 라는 세례명으로 세례 성사와 첫 영성체를 주고 신학생으로 선발한 곳이다. 또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가 1845년 11월경부터 이듬해 부활 대축일까지 약 6개월 간 기거하면서 사목 활동을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곧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이며, 조선 땅에서는 처음으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했고, 체포되기 직전 공식적으로 최후의 미사를 드렸던 곳이다.

» 마카오_ 사제수업을 위해 유학생활을 하던 곳

중국 광동성 중산현 남부, 주강 삼각주에 자리 잡고 있는 항구 도시로, 1557년 포르투갈인이 거주권을 획득한 이래 포르투갈 동양 무역의 근거지가 되는 장소였다. 동시에 가톨릭의 극동 지역 선교의 전초지가 되었던 곳이다.
1565년 예수회가 이곳에 본부를 두어, 성 바오로와 성 요셉의 두 신학교를 설립, 성직자를 양성하였고 예수회가 일본 및 중국에 대한 선교를 가능케 하는 데 큰 공을 남겼던 곳이다. 그리고 1732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중국을 위시한 조선 선교를 위한 물자 조달과 성직자들의 교황청과의 서신 연락을 담당했던 곳이다. 1831년 조선 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브뤼기에르 주교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성직자들이 이곳을 경유하여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다. 특히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조선 입국을 원했던 모방 나 신부와 이곳을 경유, 서양인 성직자로서 1835년 처음으로 조선 입국에 성공한 후, 그 이듬해인 1836년 한국인 사제 양성을 위해 김대건(안드레아), 최양업(토마스), 최방제(프란치스코) 세 소년을 마카오로 유학을 보내게 된다. 이들 세 소년은 파리외방전교회 경리부장 르그레즈와 신부의 지도를 받으며 1842년까지 6년간 이곳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세 사람 중 최 프란치스코는 이곳에서 병사 하였다. 머나 먼 타국 땅에서 김대건 신부와과 최양업 신부가 조선 복음화를 위한 사제 수업을 받았던 유서 깊은 장소이다.

» 필리핀 롤롬보이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동상이 건립 된 곳으로 필리핀 마닐라에서 약 4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이곳은 그 당시 도미니코 수도회의 농장이 있었던 장소로 1836년 15살 되던 때에 최방제와 최양업과 마카오에서 유학하던 중 1839년 4월 마카오 민란으로 피난하여 라틴어와 신학을 공부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1985년 오기선 신부가 현지를 답사하여 개인 소유였던 이곳이 도미니코 수도회 농장이었던 것을 확인된 후 소유주인 모데스따, 멘도사 할머니에게 동상 부지를 제공해 줄 것을 간청하여 승낙을 얻어낸다. 그 후 김대건 신부 동상은 김수환 추기경과 말롤로스 교구장 알마리오 주교 그리고 윤공희 대주교, 김남수 주교, 오기선 신부를 비롯한 현지 교민, 많은 순례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1986년 5월 22일 건립 되었다.

» 소팔가자(小八家子)성당_ 김대건 신부의 부제 서품 장소

소팔가자는 중국 장춘에서 약 1시간 30분 거리에 있다. 마카오에서 유학하던 김대건 신학생은 통역관으로 프랑스 해군 세실 제독과 남경조약 체결에 참석차 1942년 3월 26일 프랑스 메스트르(Maistre) 신부와 프랑스 군함을 타고 마카오를 떠나 마닐라를 경유하여 중간 기착지인 현재 대만의 탐수진 항구를 거쳐 1842년 7월 담수진을 떠나 상해에 도착, 남경 조약에 참석하게 된다.
그 후 10월 11일 청나라 목선을 타고 그 달 25일 요동 지방의 대장하에 도착, 요동 서남 끝에 있는 백가점에 체류하다가 제 3대 조선교구 주교로 임명된 페레올 주교가 머물던 내몽고 소팔가자로 갔다. 이곳에서 조선 교우들의 박해 상황을 전해 듣고 김대건과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으로 입국할 계획을 세웠으나 만주 교구 방(Verolles) 주교의 만류로 포기하였다. 소팔가자는 후일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이 부제품을 받은 장소이며 여덟 가족이 정착해 처음으로 마을을 형성하면서 소팔가자라고 불렸다.

» 상해 진쟈샹(金家巷김가항) 성당_ 김대건 신부의 사제 서품 장소

중국 상해의 진쟈샹 성당은 한국 교회의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1845년 8월 17일 제3대 조선교구장이신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유서 깊은 곳이다.

서품식은 페레올 주교의 주례로 다블뤼 신부를 비롯하여 서양인 신부 4명과 중국인 신부 1명이 공동으로 집전하였다. 성당 안에 있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기념 경당에는 김 신부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진쟈상 성당으로 발음되는 金家巷 성당은 17세기 명나라 숙종(162-43)때 중국 화동지역 최초의 성당으로 건립된 후 1841년에는 남경교구 주교좌 성당으로 지정되었고, 중국교회 동부지역 복음화의 산실임과 동시에 한국 교회와도 많은 인연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진쟈상 성당은 김씨 성을 지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아 붙여진 이름이다. 말 그대로 김씨들이 모여 사는 골목이라는 뜻이다.

» 헝탕(橫塘횡당) 신학교 성당_ 김대건 신부의 첫 미사 봉헌지

사제로 서품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서품 7일 뒤인 1845년 8월 24일 첫 미사를 봉헌한 헝탕 신학교 성당으로 현재는 상해에서 35Km 거리에 위치해 있으며, 현재는 납골당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 제주도 용수 성지_ 귀국선 라파엘호가 풍랑으로 표착한 포구

제주도 서쪽 한경면 용수리 포구는 김대건 신부가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서해 바다로 귀국하는 길에 풍랑을 만나 표착했던 곳이다.
부제 때 일시 귀국했던 김대건 신부는 선박을 구입(‘라파엘호’라 명명)하여, 1845년 4월 30일 이 배를 타고 제물포항(현 인천항)을 떠나 상해로 가게 된다. 그리고 동년 8월 17일 진쟈샹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고, 8월 31일 조선 입국을 위하여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김대건 신부 그리고 교우 및 선원 등 14명이 승선한 라파엘호는 상해를 출발하였다. 그러나 출발한 지 3일만에 서해 바다에서 풍랑으로 표류하다가 9월 28일, 제주도 용수리 포구에 표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2-3일 동안 배를 수리하고 음식 등을 준비하여 10월 1일, 그곳을 떠난 일행은 10월 12일, 금강 하류 황산포 화산 언저리 부근에 도착하였다.

» 새남터 성지_ 많은 성직자, 지도자들이 치명한 순교 성지

김대건 신부, 처음 한국에 들어왔던 외국인 신부인 중국인 주문모(야고보) 신부, 최초로 한국에 들어왔던 성 앵베르 주교, ‘기해일기’의 현석문 가롤로 성인을 포함하여 아홉 분의 성인 유해가 모셔 있는 곳이 새남터이다.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웠다. 새남터는 서울시 용산구 이촌동의 철도 공작창 인근으로, 새남터 성당 남쪽 150-200m 지점에 있다. 일부에서는 그 위치를 원효로 4가 부근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새남터’는 이 지역이 북쪽 한강변의 노들 나루터 인근에 위치한 얕은 모래 언덕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과 국사범과 같은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용되어 왔다.

그리고 새남터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부터였다. 중국인 주문모(야고보)신부가 의금부에서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이곳으로 옮겨져 4월 19일(양력 5월 31일) 처형당함으로써 이곳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당시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그 시신은 닷새 동안 백사장에 버려졌다가 군사들에 의해 몰래 이장됨으로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이후 새남터는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신자들의 처형장이 되었다.

» 미리내 성지_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페레올 주교의 묘소가 있는 박해시대의 교우촌

미리내는 순우리말로 ‘은하수’라는 뜻인데,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미리내를 한자로 미리천(美里川)이라 표기하고, 이것과 산촌(山村)의 이름을 따서 미산리라고 하게 되었다.

이 산골에 미리내란 명칭이 붙여지게 된 것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 들어 교우촌을 형성하기 이전부터 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이 교우촌은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충청도 지방의 신자들이 미리내 산속으로 옮겨 살면서 훗날 공소와 본당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곳이 특히 순교 사적지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교우들에 의해 미리내로 옮겨져 안장되면서였다. 당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순교한지 40일 만에 비밀리에 거두어져 용산 우체국 뒤편의 와서(瓦署, 일명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0월 26일 서 야고보, 박 바오로, 한경선, 나창문, 신치관, 이 사도 요한, 이민식 등에 의해 발굴되어 미리내로 옮겨지게 되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옥중 편지>

공경하올 주교님께
우리가 주교님을 떠나온 다음에 서울에서 일어난 일은 주교님께서 자세히 아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여행준비를 마친 후 닻을 올리고 순풍을 만나 무사히 연평 앞바다에 도착하였으니 바다는 어선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교님의 지시대로 실행한 후 그곳을 떠나 순위도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여행은 그때까지는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기에 끝까지 성공하리라 기대하였습니다. 그때 관장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배에 와서 중국 배를 쫓으려 하니 우리 배를 빌려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조선 법에 따르면 양반의 배는 공공부역에 동원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관장에게 이 지역에서 일을 보는데 지장이 있기 때문에 빌려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포졸들은 제게 욕을 퍼붓고 키를 맡은 으뜸 사공을 잡아가더니 저녁때 다시 와서 두 번째 사공을 끌고 갔습니다. 포졸들이 제 옷을 벗기고 마구 때리며 온갖 능욕을 퍼부으며 관가로 끌고 갔습니다.

관장이 저에게 “당신이 천주교인이오?”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관장은 저를 고문하게 하면서 “배교하지 않으면 곤장으로 때려 죽이겠소.”라고 말하였습니다.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나는 결코 우리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을것이오. 우리 종교의 진리를 듣고 싶으면 들어보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길이가 여덟 자나 되는 긴 칼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손, 발, 목, 허리를 꽁꽁 결박당하여 걸을 수도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습니다.

(중략)

주교님과 안 다블뤼신부님은 제가 죽은 후에도 깊숙히 숨어 계시기 바랍니다. 저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떨어져 있던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만 만나 보았을 뿐인데 또다시 갑작스럽게 잃고 말았습니다.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시기를 주교님께 간절히 바랍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께 마지막 하직인사 드립니다.
다블뤼 신부님께 지극히 공손한 하직인사 드립니다.
이 다음에 천당에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옥에 갇힌 탁덕 김 안드레아 올립니다.

1846년 8월 26일

메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