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위성지와 김대건신부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당시로는 면천고을 솔뫼에서 부친 김제준 이냐시오와 모친 고 우르술라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미 증조부 복자 김진후 비오와 숙조부 복자 김한현 안드레아, 당고모 성녀 데레사, 부친 성 김제준 이냐시오가 순교한 순교자 가문이다.
솔뫼에서 태어나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 골배마실로 이주하게 된다. 이때가 7살이었다. 김대건의 부친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참수 치명하신 순교성인이시다. 김대건이 첫영성체를 한 것은 1836년 1월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모방(Maubant) 신부에 의해서였다.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적당한 소년을 찾고 있던 중 골배마실 은이공소에서 김대건 소년을 신학생으로 선발하게 된다.
어린 몸에 어려운 길을 서슴지 않고 따르겠다고 나선 소년 김대건의 소망은 겨레의 영혼을 구하겠다는 너무나도 거룩하고 원대한 것이었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김대건은 7월에 서울로 올라와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그해 12월 중국인 유방제 신부가 귀국하는 길에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된다.
장차 한국교회의 순교성인으로 빛날 교우들인 정하상 바오로, 현석문 가롤로, 조신철 가롤로의 호송을 받으며 일행은 고국산천을 작별하고 부모를 떠나 만주땅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세 소년은 조선의 교우들과 작별하고 중국인 안내자를 따라 봉천, 산해관, 북경, 천진, 광동을 거쳐 목적지인 마카오를 향해 떠나게 되었다.
세 소년은 1837년 6월 6일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에 도착한다. 그러나 함께 갔던 최방제가 1년만에 병사하는 불행을 맞는다. 이역만리 타향에서 김대건, 최양업 신학생이 학업에 열중하고 있을 때 조국에서는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 김대건의 부친과 최양업의 부모님이 순교하게 된다. 모방(Maubant) 나 신부와 2대 교구장이신 앵베르 주교 그리고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 한국교회의 지도급 교우들이 순교하는 대박해였다.
조선은 또다시 목자 없는 교회가 되어 교우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김대건은 1844년 조선교구 3대 교구장으로 선임된 페레올 주교에게 12월 15일에 부제품을 받게 된다. 그리고 선교사의 조선 영입을 위해 1845년 1월 김대건은 의주쪽으로 어렵게 혼자 입국하는데 성공한다. 그에게는 교회의 실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조선교회에 주교를 맞아 들여야 하는 중대한 의무가 주어져 있었다. 외국인 성직자들이 육로로 조선에 들어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는 작은 배 한 척을 사서 현석문 가롤로 등 11명의 교우들과 상해로 돌아간다. 그리고 1845년 8월 17일 상해에서 20리쯤 떨어진 김가항이라는 교우촌의 성당에서 김대건은 페레올 주교의 집전으로 한국인 첫 사제로 서품된다. 조선교회창립 61년만의 일이었다.
8월 31일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그리고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라파엘호’라고 이름을 붙인 작은 어선을 타고 조선을 향해 출발한다. 라파엘호가 처음에는 요동방면으로 가는 중국 배에 끌리어 산동성까지 무사히 이르렀으나 갑자기 거센 풍파를 만나 키는 부러지고 돛은 찢어져 물결이 치는대로 배를 맡기게 되었다. 9월 28일 라파엘호는 제주도의 해안에 닿게 된다. 이로부터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는 금강으로 접어들어 60리쯤 올라가서 은진군 강경에서 조금 떨어진 나바위에 상륙하게 된다. 9년 만에 사제가 되어 돌아온 김대건 신부와 꿈에도 그리워하며 6년을 포교지를 향해 준비한 페레올 주교의 감사의 기도로 나바위에 첫 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1845년 10월 12일 밤, 방갓과 상제옷으로 몸을 가린 후 어두운 밤 나바위에 첫 발을 디딘 것은 상해를 떠난 지 바닷길 42일만이었다. 바로 이 세 분 성직자들의 거룩한 첫마음을 만날 수 있는 곳이 나바위 성지이다.

» 솔뫼_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
이후 김진후의 셋째 아들 김종한(안드레아, 일명 한현)이 순교했고(1816년), 1839년에는 다시 둘째 아들 김택현의 아들 김제준(이냐시오)이 순교, 1846년에는 김제준의 아들 김대건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김대건 신부님의 가문은 32년 사이에 4대가 순교하는 영광의 가문이 되었고, 솔뫼는 ‘신앙의 못자리’로, ‘한국의 베들레헴’으로 불리게 되었다.

» 골배마실_ 성소의 꿈을 키우며 소년시절을 보낸 곳

» 은이 성지_ 세례받고 신학생으로 선발된 성소의 요람

» 마카오_ 사제수업을 위해 유학생활을 하던 곳

» 제주도 용수 성지_ 귀국선 라파엘호가 풍랑으로 표착한 포구

» 새남터 성지_ 많은 성직자, 지도자들이 치명한 순교 성지
그리고 새남터가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지로 이용되기 시작한 것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부터였다. 중국인 주문모(야고보)신부가 의금부에서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이곳으로 옮겨져 4월 19일(양력 5월 31일) 처형당함으로써 이곳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당시 주문모(야고보) 신부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그 시신은 닷새 동안 백사장에 버려졌다가 군사들에 의해 몰래 이장됨으로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이후 새남터는 성직자들을 비롯하여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신자들의 처형장이 되었다.

» 미리내 성지_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페레올 주교의 묘소가 있는 박해시대의 교우촌
미리내는 순우리말로 ‘은하수’라는 뜻인데,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미리내를 한자로 미리천(美里川)이라 표기하고, 이것과 산촌(山村)의 이름을 따서 미산리라고 하게 되었다.
이 산골에 미리내란 명칭이 붙여지게 된 것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 들어 교우촌을 형성하기 이전부터 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이 교우촌은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충청도 지방의 신자들이 미리내 산속으로 옮겨 살면서 훗날 공소와 본당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곳이 특히 순교 사적지로서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은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교우들에 의해 미리내로 옮겨져 안장되면서였다. 당시 김대건 신부의 시신은 순교한지 40일 만에 비밀리에 거두어져 용산 우체국 뒤편의 와서(瓦署, 일명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0월 26일 서 야고보, 박 바오로, 한경선, 나창문, 신치관, 이 사도 요한, 이민식 등에 의해 발굴되어 미리내로 옮겨지게 되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옥중 편지>
우리가 주교님을 떠나온 다음에 서울에서 일어난 일은 주교님께서 자세히 아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여행준비를 마친 후 닻을 올리고 순풍을 만나 무사히 연평 앞바다에 도착하였으니 바다는 어선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우리는 주교님의 지시대로 실행한 후 그곳을 떠나 순위도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여행은 그때까지는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기에 끝까지 성공하리라 기대하였습니다. 그때 관장이 부하들을 거느리고 우리 배에 와서 중국 배를 쫓으려 하니 우리 배를 빌려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조선 법에 따르면 양반의 배는 공공부역에 동원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관장에게 이 지역에서 일을 보는데 지장이 있기 때문에 빌려줄 수 없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포졸들은 제게 욕을 퍼붓고 키를 맡은 으뜸 사공을 잡아가더니 저녁때 다시 와서 두 번째 사공을 끌고 갔습니다. 포졸들이 제 옷을 벗기고 마구 때리며 온갖 능욕을 퍼부으며 관가로 끌고 갔습니다.
관장이 저에게 “당신이 천주교인이오?”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관장은 저를 고문하게 하면서 “배교하지 않으면 곤장으로 때려 죽이겠소.”라고 말하였습니다.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나는 결코 우리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을것이오. 우리 종교의 진리를 듣고 싶으면 들어보시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저에게 길이가 여덟 자나 되는 긴 칼을 가져왔습니다.
저는 손, 발, 목, 허리를 꽁꽁 결박당하여 걸을 수도 앉을 수도 누울 수도 없었습니다.
(중략)
주교님과 안 다블뤼신부님은 제가 죽은 후에도 깊숙히 숨어 계시기 바랍니다. 저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떨어져 있던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만 만나 보았을 뿐인데 또다시 갑작스럽게 잃고 말았습니다.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시기를 주교님께 간절히 바랍니다.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께 마지막 하직인사 드립니다.
다블뤼 신부님께 지극히 공손한 하직인사 드립니다.
이 다음에 천당에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옥에 갇힌 탁덕 김 안드레아 올립니다.
1846년 8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