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바위성지 이야기
나바위는 한국의 첫 사제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가 되어 조국에 입국하며 첫발을 디딘 축복의 땅으로 ‘첫 마음의 성지’ 로 불리고 있다.
1836년 12월, 15세의 나이로 조국을 떠나 마카오에서 사제 수업을 마치고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1845년 1월 선교사들의 입국 통로를 개척하고 그들이 거처할 집을 마련코자 서울에 입국하였다. 그리고 1845년 4월 선교사를 모셔올 목선을 구입하여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중국으로 돌아가 그 해 8월 17일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8월 31일, 11명의 교우와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타고 갔던 배편으로 귀국길에 올라,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끝에 1845년 10월 12일 밤 8시 경 강경에서 좀 떨어진 ‘황산포 나바위 화산 언저리’에 닻을 내렸다. 나바위로 정박한 이 일을 페레올 주교는 그의 편지에서 ‘하느님의 섭리’라고 하였다.


1845년 8월 31일 김대건 신부는 중국 상해에서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 그리고 11명의 한국인 신자들과 함께 포교지인 한양을 향하여 라파엘호를 타고 항해하였다.
그러나 폭풍우와 풍랑을 만나 돛 대와 키가 파손되어 표류 하다가 제주도 용수리에 닿았다.
그곳에서 배를 정비하여 다시 북상하였으나 반파 상태인 배로는 항해가 불가능하자 계획을 바꾸어 강경에 정박하기로 하였다.
그곳에서 배를 정비하여 다시 북상하였으나 반파 상태인 배로는 항해가 불가능하자 계획을 바꾸어 강경에 정박하기로 하였다.
선원 일행 중에 강경 신자들과 강경 일대의 지형을 잘 알고 있던 자가 있었다. 당시 강경포는 조선 3대 어시장 중 하나였으므로 번잡하고, 황산포와 낭청포는 나루가 있어 사람들에게 발각될 위험이 있었다.
그러기에 배들의 오고감이 드물고 상선도 정박하지 않던 아주 작은 황산포 나바위 화산 언저리가 착륙하기 알맞은 곳이었을 것이다.



화산정상에 세워진 김대건 신부 나바위 착지 110주년, 시복 30주년, 나바위 성당 건축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기념탑이다.
상해를 떠나 42일간 바닷길로 입국할 때 타고 온 라파엘호의 크기를 본떠 세운 것이다.
기념탑의 크기는 김대건 신부가 타고 왔던 라파엘호를 본떠 같은 크기로 순교비의 높이 15자, 기념비 6자, 십자가 4자로 제작하였다.
나바위성지는 화산이라는 산에 있다. 산이 아름답다고 해서 우암 송시열이 붙여준 이름이다.

화산의 끝자락에 넓은 바위가 있어 나바위라 불린다. 금강의 강변에 자리한 화산은 산 밑 서북쪽으로 물이 닿았고 갈대숲이 우거졌다. 이곳에 나바위 성당이 설립된 후 초대 대구 교구장이신 드망즈 주교가 해마다 5, 6월이면 연례피정을 화산 정상에 있는 나바위에서 가졌다. 개인피정 장소로 더할 수 없이 아름답고 조용한 분위기를 감탄하며 피정을 하시는 주교님을 위해 베르모렐 신부는 1915년 정자를 지어드렸다. 이 정자를 드망즈 주교는 망금정이라 이름붙였다.(望錦 바랄 망, 아름다울 금 )
금강을 바라보며 세 분 성직자의 아름다운 영혼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장소이다.
성당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평화의 모후’가 자리하고 있으며, 1200명 정도 야외미사를 할 수 있다.



나바위 본당 2대 주임 소세 신부의 무덤이다.
소세 신부는 부임한지 2년 만에 무릎종양이 악화되어 강경병원에서 수술을 했으나 숨졌다. 그의 주검은 나바위 성당을 바라보며 묻히기를 원하던 소세신부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묻혔다.
1코스 : 성모동산 뒤쪽에서 시작하여 망금정까지 오르며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다.



2코스 : 피정의 집 뒤편에서 시작하여 착지점을 지나는 코스로서 산길이 힘든 사람도 십자가의 길을 걸을 수 있다.


